총독부는 토지 소유자의 조사를 실시하고 소유자가없는 토지는 접수하고동양 척식에 매입하고, 일본인 이민자와 조선인 유력자에 분배했다. 총독부가 접수한 농지는 전체 경작지의 3.26 % 정도이다[58]. 조선 말기의 조선은 도로, 농지, 산, 하천, 항만 등이 황폐하고 백성들은 관료주의 지주 양반에 고리 (마 노리)에 의한 수탈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의 농지에서, 수방 공사와 수리 공사를하고 금융 조합도 만든 것으로, 농민들은 싼 금리로 대출을받을 수있게되어, 조선인 농민에 큰 이익을 가져올 것 되었다. 또한 수리 조합의 설립은 안심하고 농경 수 있도록되었다[59]. 지주 조선 사람은 생산성을 높이고 일본에 쌀을 수출할 수있게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삼성 그룹의 창시자인이병철이다. 그는 경남 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나, 쌀 수출로 얻은 막대한 자금을 밑천으로1938 년에대구에서삼성 상사를 설립하고, 이것이 훗날삼성으로 발전 해 갔다[60] 이처럼농지가 새롭게개간되어 수리 사업에 의해 생산 능률이 향상됨에 따라 식량 생산이 증가했다.
그러나미국의 대부분이 일본 (본토)에 수출 되었기 때문에 조선인 1 인당 쌀 소비량은 1919 년 ~ 1921 년 평균 0.68석(미 1 석은 약 150kg)에 대해 1932 년부터 1936 년까지 은 0.40 바위까지 감소했다[61]. 이 상황을 가리켜 "기아 수출"라고 부르는 연구자도 존재한다[62]. 반대로모든相仁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 시대의 쌀 소비량은 평균 0.58 바위 수준을 유지, 하반기에 오히려 소비가 다소 증가하고 있다고하는 연구자도 존재하고있다. 또한 한국 경제 전체로 보았을 경우 미국 이외의 잡곡이 대량으로 수입되고있어 고가의 쌀을 판 대금으로 싼 잡곡을 더 구입하여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서울 대학교의리 영 훈교수는 한국의 "일제토지 수탈 론 "는신화이다 며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알고있는 한국인의집단적 기억은 많은 경우에 만들어진 것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라고하고있어"음식을 일본으로 반출 것도 시장을 통한 상행위에 기초 "라고 말하고있다[63][64]. 또한, 한국인의 신장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1920 년대 중반까지 "조선인의 생활 수준이 꾸준히 향상 것은 분명"라고하는 견해도 존재한다[6
하멜표류기
읽어보기